2005년 03월 31일
술이 잠 들어 있었네

Cave in Saint-Emilion, France...by fascinated
와인을 찾아 떠난 여행이었죠.
프랑스 와인의 양대 산맥인 보르도와 브루고뉴를 다 가고 싶었습니다. 길을 잡기 위해 지도를 보니...보르도는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는 코스에 있었고, 브루고뉴는 정반대 방향인 남동쪽에 있더군요. 대륙은 끝도 없이 넓고...제가 가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그중 어느 하나만 선택해야 했죠.
프로스트의 詩처럼,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 대한 미련은 치명적 그리움처럼 깊어서...보르도를 택한 그 순간부터 시작된 '브루고뉴의 숲'에 대한 미련은 여행 내내 아쉬움으로 남더군요. 다시...같은 주제의 여행을 반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죠.
중부 Tours 지방의 아름다운 성들을 뒤로 하고...저녁길을 서둘러 서쪽으로 또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첨엔 국도를 탔지만...길을 잃을 염려가 있어 고속도로로 들어갔죠. 시속 130Km 규정속도의 고속도로로 밤길을 가니...어쩌다 갑자기 만나지는 공사 구간을 보면, 롤러코스터라도 타다 장애물을 만난 기분이더군요.
게다가 다른 차들은 대략 150Km까지 속도를 내는데...전 방심하는 새 자꾸만 속도가 120Km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엑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이 피곤했죠. 우리나라에선 가끔 과속이 스릴있게 느껴지더니...막상 하라니까 감당을 못하겠더군요.
파리를 벗어나면...인구가 적어 폐가처럼 한산한 중세 도시들의 연속인 프랑스. 한적하다 못해 음산한 기운이 맴돌 지경이었죠. 개 짖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휴일의 작은 도시들에선 페스트가 휩쓸고 지나간 중세유럽을 상상했습니다. 사람의 자취가 그립기도 하고...막상 누가 나타나면 더럭 겁이 나기도 하더군요.
그 한적함의 연속 속에 제 눈에 들어온 보르도란 오래된 도시의 감흥은 정말 색달랐죠. 옛 건물 그대로...다리가 있고, 바다로 향하는 강이 있고, 항구가 있었습니다. 18세기며 19세기, 그네들의 근대성이 혁명으로 용솟음치고...쌓인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세계로 뻗어나갔을 그 활기의 한 가운데 있는 느낌이었죠.
그 항구 한끝으로 상선이라도 하나 들어 올 듯한 착각에 젖기도 했습니다. 토니륭(양가휘)을 자동차 안에 남겨 두고 떠나온 영화 '연인'의 그녀를 실은 하얀 배가 들어올 듯도 싶었구요...사랑하는데 평생 다시는 못 만나는 건 얼마나 잔인한 일일까...감정을 칼로 베어내듯 끊어내기란 목숨을 끊는 것 만큼이나 모질고 모진 일이었겠죠.
항구의 저녁 답게...길 위의 한 여인이 짙은 화장으로 고달픈 얼굴을 감추고...길 가던 남자를 잡아 하룻밤을 흥정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퇴근길 차량으로 뒤얽힌 거리는 한번 길을 잘못 들자, 정체의 고통 속에 적잖은 시간을 흘려 보내게 했죠. 여행자에게 길위에 갖힌 얼마간은...인생에서 낭비한 십수년의 시간 만큼이나 안타깝죠.
덕분에...오래된 뒷길들과 광장길을 돌아 숙소를 찾아 헤맸습니다. 자정이 거의 다 되어 들어간 호텔에선 세수만 간신히 하고 잠이 들었죠. 카페오레와 온갖 프로마쥬, 샐러드와 크로와상이 있던 맛있는 쁘티데쥬네(아침식사)가 아니었으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스쳐간 도심의 숙소.
오전의 맑은 하늘을 느끼며, 온화한 메를로 품종의 생테밀리옹 와인산지, 생테밀리옹 지역쪽으로 길을 잡았죠. 와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익히 들어보았을 강이름들이 지도 위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네들의 강 풍경이...전 참 좋더군요. 이파리 무성한 나뭇잎새로 언뜻 언뜻 보이는 정겨운 물길. 도르도뉴 강이며 가론강, 론강, 르와르강의 지류들을 지나며...다리가 나오고, 강이 나올 때마다 경치가 하도 예뻐 캠코더를 들곤 했습니다.
생테밀리옹 지역(특히, 루삭생테밀리옹)은 보성의 차밭과 흡사한 곳이었죠. 서늘하고 경사진 밭...적당히 습하고 적당히 쾌적한 공기.
차를 오래된 성당 앞에 세우고...30분마다 한번씩 포도밭들을 순환하는 작은 기차를 탔습니다. 도착하는 포도밭마다 여자와 남자가 번갈아 영어, 불어로 안내 방송을 하는데...어느게 불어고 어느게 영어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더군요. 영어까지도...입끝을 약간 내민 채, 불어식으로 도도하게 발음하니 말이죠.
불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파리에선 한 허름한 소년이 구걸을 하는데...그 끝에 두 손을 내밀며 '실부플레'(=Please)하고 깍듯이(?) 부탁하더군요. 영어권 정서상...왜 불어가 예의와 사교성을 의미하는지...단박에 느껴질 정도로 우아했죠. 나즈막하게 깔리는 어조로 부드럽게 읊는 그 발음과 억양 때문에 구걸조차 그리 근사해 뵈다니 참 신기한 일이죠.
들판에 내려쬐는 뜨거운 햇볕을 고스란히 맞으며 찾아 헤매던 끝에...목표했던 포도원 지하 창고로 들어갔습니다. 사실 실제 목표는 다른 곳이었죠.
제대로 된 포도원들을 돌아 보려면 며칠전 쯤 전화로 예약을 해야한다고 합니다. 유명 포도원일수록 규정이 까다로와 외부공개 시간도 정해져 있는 곳이 많죠...미리 계획하지 않으면, 갑자기 가서 보여 달래도 절대 안 보여주더군요. 경우에 따라 우아한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곳도 있구요. 그런 세세한 정보를 현지에 가서야 알았으니...원하던 그럴듯한 포도원 대신 사철 방문이 가능한 중소 포도원을 택할 수밖에 없었죠.
사진 속 지하 15M의 이곳(Cave)은 늦 여름 더위를 식혀 줄만큼 서늘하고 쾌적했습니다. 라벨을 붙이지 않은 와인병들과 오크통들이 꿈처럼 잠 들어 있던 곳. 그네들 하나하나는 웃음이 오가는 파티장이든, 호화로운 요트 위든, 아님 사랑을 나누는 두사람만의 꿈 같은 하룻밤을 위한 여흥주든...이제 저마다의 사연으로 세상을 만나겠죠.
잠든 와인들의 행복한 행로를 상상하다...1층 매장에 올라와 와인을 몇병 샀습니다. 여러 빈티지들을 '시음'이란 명목하에 맘껏 맛 보며 비교 해 보고 난 끝이었죠. 들고 오기엔 너무 무거워...겨우 몇병인가 사다가 누구한테 주고 또 누구한테 주고...제 손에 남은 단 한병을 얼마나 아끼고 아껴서 마셨던지.약간 가볍고 그을린 맛을 내던 2002 생테밀리옹이었죠.
(사진 찍어 둔 게 없어 면세점에서 산 '오 메독' 사진을 대신 옆에...)
# by fascinated | 2005/03/31 12:36 | 길 위의 날들 | 트랙백 | 덧글(1)




